
여의도의 지하,
그곳은 지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심연이었다.
‘글의 집’의 문이 닫히는 순간,
한시우는 자신이 시공간의 경계선을 넘었음을 직감했다.
공기는 오래된 양피지의 향기와
말라붙은 잉크의 냄새로 가득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가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장부들이
마치 거대한 용의 비늘처럼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42만 원에서 500만 원이라…”
서가 사이로 흐르는 목소리는
비단 위에 옥구슬을 굴리는 듯 청아했으나,
그 속에는 만년 설산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 드레스는 밤의 어둠을 깎아 만든 듯했고,
그녀의 눈동자는 금빛 별가루를 뿌려놓은 듯 신비롭게 빛났다.
그녀의 이름은 서린.
이곳의 주인이자, 여의도의 모든 비밀 자금을 엮어내는 거미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본의 숨결을 읽어내다니,
마치 보검을 처음 잡은 무인이
검기를 발산하는 꼴이군요.”
서린의 비유는 날카로웠다.
그녀는 김용의 소설 속 기인처럼
돈의 흐름을 하나의 무공(武功)으로 보았다.
시우는 숨을 죽였다.
그녀의 존재감은 마치 톨킨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고대 엘프 여왕의 위엄과도 같았다.

“돈은 숫자가 아닙니다.”
시우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것은 누군가의 눈물이고, 피이며,
가장 간절한 소망이 응축된 시(詩)입니다.”
서린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려졌다.
호기심.
자본의 화신이라 불리는 그녀의 심장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롤링의 마법 학교에서 금지된 구역을 발견한 학생처럼,
그녀는 시우라는 존재가 가진 마력에 이끌리고 있었다.
“시(詩)라… 그렇다면 그대의 시로
이 텅 빈 장부를 채워보겠습니까?”
그녀가 낡은 만년필을 건넸다.
만년필의 끝에서는 푸른빛의 자본의 마력이 감돌고 있었다.
시우는 펜을 잡았다.
그것은 단순히 계약서에 서명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본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투신시키겠다는 맹세였다.
심장과 화폐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비트가 튀고, 환율이 요동치며,
지하 살롱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랑은 아직 일지 않았으나,
그 씨앗은 이미 전설의 토양 위에 뿌려졌다.
제5장 끝.